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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일상

반도체 일상 6. 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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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항상 인두기를 손에 들고 다니며 회로 납땜에 몰두하는 선배가 한 분 계셨다. 납 냄새를 풍기며 짙은 다크서클을 드리운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박종철 씨(가명). 그에겐 회로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매일 새벽, 그의 방에는 불이 꺼질 줄을 몰랐고, 그때마다 “아, 또 잘못 연결했어! “라는 괴성이 새어 나오곤 했다.

 결국, 박종철 씨는 탈모가 시작되었다. 과거로 돌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종철 씨의 머리털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만약 실제 부품을 PCB 기판에 꽂고 납땜하기 전에, 충분한 검증을 거쳐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라는 매뉴얼을 만들어 줬다면, 박종철 씨는 회로를 다시 만드는 수고를 줄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납땜질은 하지 않고, 시뮬레이션으로만 작업이 이루어진다. 몇십 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머리카락을 더 많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실제로 회로를 제작할 때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정상적으로 동작할지 몇번이고 확인하고 제작해야 한다. 따라서 제작 전 정밀한 시뮬레이션이 필수다. 사실, 회로의 역사는 곧 시뮬레이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 회로 설계는 멋진 그림을 그리며 "이렇게 하면 애플을 능가하는 칩이 나오겠군!" 하고 천재성을 뽐내는 영웅적인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회로의 동작 과정을 한 줄 한 줄 코딩한 후, 그 결과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보고, 다시 코드를 조금 수정한 뒤 또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연속이다. 물론 이렇게 코딩을 끝낸 후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회로가 짠 하고 만들어지긴 한다. 아직 손으로 그리며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회로의 영역도 있다. 바로 아날로그 회로 설계인데, 전력과 관련된 망가지기 쉬운 부분을 직접 설계하는 영역이다. (사실 이것도 이제는 손이 아닌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회로의 발전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각종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의 발전, 트랜지스터 기술의 진보, 그리고 연산 알고리즘의 개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발전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회로 설계자들을 골탕 먹일 수 있을지가 궁금할 뿐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뮬레이션에 사용하는 트랜지스터와 저항의 실제 측정 값을 속이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게 발각될 수 있으니, 조금 더 미묘하게 불량을 유발하는 방법이 좋아 보인다. 회로 시뮬레이션 후에는 항상 실제 제작을 통해 전기적 동작 테스트를 진행한다. 이때 전기를 연결하기 위한 여러 핀이 존재하지만, 해당 테스트 때 사용하지 않는 핀도 있다. 이 사용하지 않는 핀에 살짝 다른 고전압이 흐르는 핀을 연결해 보면 원인 미상의 불량이 발생한다. 보통 회로가 보통 녹아버리기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회로가 고장 나고 있는 진 풍경이 펼쳐진다..

 오늘은 불쌍한 박종철 씨의 파란만장한 회로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어김없이 교훈은 있었다. 회로는 시뮬레이션이 필수라는 것. (하지 않으면 불쌍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고장을 내고 싶다면 회로 설계 자체를 건드리기보다는 테스트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이 들킬 확률이 적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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